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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0,3061,3062] 수행자의 자세 (1,2,3)

by 웰빙원 2025. 11. 25.

수행자 중에서도 공부자가 있고 수행 후 펼치는 자가 있다. 공부자는 낮추는 것만이 내 공부이다. 나를 낮추는 기초공부가 안 마쳐지면, 절대 다음 2단계 공부로 넘어갈 수 없다. 신이 접신이 돼서 능력 얻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다. 이는 신보다 약하니 신한테 끌려다니는 것이니 내 힘이 아니다. 신줄과 수행자는 다르다. 수행자는 신과는 전혀 관계없다.

수행자는 나를 공부하는 것이 수행자이다. 뭘 공부하냐? 나를 철저히 낮추는 공부를 한다. 상대를 존중하고 자연을 존중한다. 내가 잘났다고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니다. 나를 철저히 낮출 수 있는 사람. 이 공부가 마쳐지면 2단계를 간다. 내가 가려 안 해도 자동적으로 간다. 수행을 바르게 하면 자연이 다 이끌어준다. 이끌어줄 때마다 내게 오는 사람과 인연이 다르다. 내가 따로 욕심내지 않아도 다 해준다. 그러니 어떤 환경도 불평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불평을 하게 되면 수행을 잘못한 것이다. 수행이 잘못된 것이 나오면, 바닥에 떨어뜨려서 처음부터 다시 수행시킨다.

시험에 걸리는 것은 단 1개이다. 불만불평이다. 사회인도 환경에서 불평하면 1단계 떨어진다. 수행자도 똑같다. 수행을 마친 사람은 불평은 안 한다. 불평해도 되는데 하고 나면 너가 한단 떨어진다를 알고 해라.

수행자는 내게 준 조건과 환경을 분별하지 않는다. 감사히 여긴다. 이를 감사히 여기고 있으니 자동으로 다른 환경을 준다. 불평을 하면 수행이 잘못됐다는 증거를 내가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조건을 줘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히 여긴다. 이것이 수행의 척도이다. 불평하려면 떠나라. 이것이 정답이다. 다른 조건에 가라.

그래서 수행자들이 이동한다. 불평하니 이동한다. 그러니 수행자들이 이동이 그렇게 많다. 이 사찰, 저 사찰 이렇게 평생 돌아다니다가 죽어버린다. 수행의 근본을 모른다. 불평이 없으면 절대 갑갑하지 않는다. 불평이 조금씩 모여서 갑갑해진다. 불평은 욕심 없이 안 난다.

조금만 환경이 좋으면 남을 이기려 하고 욕심을 낸다. 모자랄 땐 얻기 위해 굽히고. 힘이 떨어져야지 너가 수행을 한다. 3년만 제대로 굽히면 너는 수행이 끝난다. 이게 끝나야 2차를 간다. 누가 니 앞에 잘난 척을 해도 그런가보다 하고 흡수하고 내 갈길 가면 되지, 왜 거기에다 참견하고 싸우냐. 뭐가 너한테 이득이 된다고. 그냥 가면 된다. 3년만 등신이 돼라. 수행자는 다른 것 없어. 일단 기초훈련이 되어야 한다.

그래수 수행은 젊어서 해야 하고, 나이 많아서 하려니 아예 못 한다. 나이가 이렇게 많은데 굽히기 싫은거라. 그래서 너는 수행을 못 한다. 이렇게 된다. 대자연이 안 주는 것을 불평하지 마라. 안 줄 때는 안 주는 이유가 있어서 안 주는데 불평하면 어떻게 하냐? 내가 바르게 했으면 절대로 바르게 필요한 것 다 준다. 안 주면 반개 쓰고 또 안주면 또 더 쪼개쓰면서 노력해야지, 불평하면 완전 끊어버린다. 뭔가한테 잘못 보인 것이다. 이유는 다 나한테 있으니, 불평하고 남탓하면 안 된다. 안주면 안주는 곳에서 최대한 노력하면서 가야 한다. 너무 안줘서 굶었다. 그럼 굶어라. 끝까지 안 줬다. 그럼 며칠 굶으니, 또 나한테 있는게 내 몸 안에 비계, 지방이니 이를 또 최대한 잘 쓰면 된다. 몸도 걷어가면 걷어가게 두면 돼지. 그것이 죽는 것이거든. 몸에 지방 다 떨어졌는데도 안 준다. 그럼 죽으면 돼지 뭐가 그리 애살스럽게 살려고 발버둥치냐. 그냥 죽고 말지.

차원에서 안 주면 안 주는대로 가. 그렇게 해서 죽으면 영혼이 얼마나 깨끗해지는 줄 알아? 이 이상 맑은 영혼이 없다. 자연을 믿고, 자연이 안 주시니, 이유가 있겠지 하고 그냥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가면 진짜 하나님의 일꾼이 된다. 죽으면서 기름, 지방 다 태웠는데, 얼마나 깨끗하나. 욕심 없이 그냥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가니, 이 영혼을 하나님이 쓴다. 안 죽으려고 빠당거리는 탁한 놈을 하느님이 쓸까봐. 이것이 수행이다.

수행을 불평하지 않는다. 너가 불평할 때 이동수가 난다. 여기에서도 또 불평하면 또 이동수가 난다. 이를 못 깨친 수행자는 평생 이동하다 뒤진다. 수행은 신하고는 1도 관계가 없어. 수행은 100% 내 자아를 수행해야 한다. 이 생의 결과가 모든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얼마나 노력했는가에 영혼이 맑아지고 안 맑아지고 하는 것이다.

불평하면 한단 떨어지는 이동수가 나나, 모든 것을 감사히 여기면 자연이 스스로 돕는다. 자연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믿고 3년만 바보처럼 살아. 왜 그리 바보가 안 되려고 생지랄을 하냐. 그냥 한번 돼봐. 그래놓고 뭔 수행을 했다고 지랄이야.

모든 원리를 알고 접하면 불평이 안 된다. 모르고 접하니 불평이 난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나? 이렇게 생각한다. 원리를 모르니 이런 생각을 한다. 어디에서든지 제일 처음에 갔을 때에는 낮은 자세여야 한다. 제일 낮은 자세로 가서 배워야지 중간에 덜렁 가서 배울 수 없다. 배우는 것은 제일 낮은 자세에서 배워야 한다. 이것 만이 정상적으로 배우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절대 새치기가 없다. 새치기하면 뽑아내서 낮은 대로 보낸다. 내려가서 기본 몇 년 헤매. 처음부터 낮은데 들어가서 하면 3년이면 끝난다. 모르니 중간부터 가려고 욕심내니 5, 10년 헤맨다.

사미 밑에서 일하면, 빨래를 빨리 말려야 하는데 겨울에 마르질 않으니, 잘 때 몸으로 마르게 하면서 잔다. 이쪽 다 했다가 또 몸 다른 쪽에 대면서 다른 쪽을 말린다. 얼마나 바보 같노. 그런데 자연은 이 정성을 보는 것이다. 이미 이 자가 견성할 자인지 아닌지는 벌써 사미 밑에서 시험 다 봤다. 사미 밑에 3년 수행에 이미 모든 시험이 다 끝났다. 수행자가 낙방할 자와 견성할 자는 이 때 이미 다 결정난 것이다. 이것이 3년 수행이다. 수행을 뭘 더 배우는 게 아니라, 나의 모순된 점을 다 씻어내는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고개 들지 못하게 나를 끝까지 씻어내야 한다. 모순이 고개를 들지 않도록 나를 다 씻어내는 게 수행의 근본이다. 이것만 하면 된다. 수행한자가 뭘 능력을 얻으려 하냐. 주면 잘 쓰면 되고 안 주면 또 그렇게 가면 되고. 세상에 잘 쓰이면 또 잘 쓰이면 되고, 안 쓰이면 그냥 돌아가면 되고. 주고 안 주고 이런 걸림이 없다.

철저히 나 자신의 모순을 전부 씻어내는 것이 수행이다. 몰라서 수행하니 엄청 받쳤다. 기초 공부 없이 수행한 것이다. 알고 하면 하나도 안 받친다. 몇 번 받쳤는데 지가 울그락불그락 해서 가면, 너는 수행근기가 안 되니 가는 것이다.

낮은 곳은 낮은 곳이 아니다. 내가 있을 곳이다. 나를 낮춘 사람이 낮은 곳에 있으나, 이것이 낮은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가르쳐주는 것은 수행자의 자세이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너가 수행을 할 것이냐, 아님 다른 삶을 살 것이냐. 다르게 살면 또 다르게 사는 법칙이 있고, 수행자의 삶을 살겠다하면 수행자 삶의 법칙이 있다. 이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누구든지 다 수행하라는게 아니다. 수행자의 삶이라면, 수행자는 지극히 낮아야 하고, 불만이 없어야 한다. 수행 공부는 수행공부 원리가 있고, 다른 공부는 다른 공부 원리가 있다. 나는 어떤 공부를 하고자 하는가부터 잡아야 한다.

나는 사회생활 속에서 나를 만지면서 공부하면서 가고 싶다라고 하는 것과 나는 수행자의 공부를 하겠다라는 것은 다른 것이다. 생활속에서 공부할 사람은 생활을 70%로 하고, 30%을 공부로 잡으면 된다. 그런데 너무 그동안 공부가 밀려서 수행을 하고 생활공부로 가야 된다라고 하면 수행공부를 70%으로 잡고 생활을 30%으로 잡으면 된다. 그런데 공부 밀린 게 도를 넘어서 완전 수행자로 가면 그 수행자 공부라 가야 한다. 그만큼 떨어진 것이다.

수행자 공부는 처음부터 너가 태어나서 수행자 공부하는 게 아니다. 네가 준 여건들을 잘못 활용해서 쓰니, 부딪치면서 어려워져서 기운도 다 소진해서, 나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려니 수행을 들어가는 것이다. 조금 어려워지면 70% 선에 있고, 많이 어려워지면 30% 선에 있다. 아예 바닥에 떨어지면 0%라 내게 준 모든 조건을 다 소진했기에, 0%부터 처음부터 다시 수행해야 한다. 이래서 수행하는 것이다.

바보는 수행 안 한다. 똑똑한 놈이 수행한다. 똑똑한 것은 자연이 준 것이다. 오행도 잘 주고, 미리 아는 감각도 주고, 미래를 읽는 감각 등 조건을 잘 줬다. 이런 조건들을 불만하고 욕심내면서 내가 잘못 쓴 것이다. 그러니 계속 떨어지는 것이다. 떨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해야 하는데, 떨어졌던 위를 계속 보고 지금을 불만불평하고 있으니, 이건 욕심이다. 또 떨어진다. 30% 밑으로 떨어진 것은, 너는 이제 수행하지 않으면 2번 다시 자연의 조건을 못 받는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럼 수행의 정체는 뭐냐? 낮은 자리에서 시작해라. 불만하지 마라. 3년 동안. 3년을 이겨내야 한다. 3년 후에 깨끗해진 사람에게 좋은 환경을 주면 이제는 이겨내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수월하게 소화가 된다. 얼마나 빛나겠어? 욕심없이 주어진대로 가니까. 잘 하니 또 줘. 그럼 또 욕심없이 주어진대로 가. 이러면서 발전한다. 완전히 해탈하면서 벗어난다.

그래서 당신들이 물어야할 것은, 내게 주어진 조건으로 지금 생활환경에서 어떻게 공부하면서 살아야 합니까?를 물어야 하는데, 수행이랑 개념이 헷갈려서 자꾸 수행을 물어본다. 사회생활 하면서 묻는 사람은 공부를 묻는 것이지, 수행공부를 묻는 게 아니다.

또 한가지는 제자는 수행이 되어서 자연이 이끄는대로 욕심내지 않고 갈 수 있을 만큼 깨끗해야 남들을 위할 수 있다. 제자가 수행을 안해서 어떻게 남을 위하냐. 어떤 조건을 줘보는데, 너가 잘못 하지 않냐? 인연들을 많이 줬다. 안 줬냐? 다 줬다. 내가 알던 모르던 잘못 쓴거다. 그래서 바닥에 앉혀놨다. 그럼 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이 외길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을 시킨다. 거기에서부터 불평하지 마라.

가진 자는 원래 불평이 많다. 아무것도 안 가진 자는 불평이 없다. 내게 아무것도 없어야 불평이 없다. 수행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야 한다. 이것을 알 때까지 바닥에 내팽겨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마지막 자존심이 남아 있으니, 이것을 너에게 어떻게 가르칠까?

생활에서의 공부와, 수행의 공부가 다르다는 것을 설명했다. 지금은 전부 다 수행공부와 생활공부와 뒤섞여서 말하니 헷갈리는 것이다. 수행이 안 된 자가 지식을 가지면, 사회를 어지르고 그냥 가는 것이다. 내 논리만 만들다가 시간낭비하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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